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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종대왕이 화, 분노한 순간, 정찬손에게 일침, 이유, 사람의 천품, 선민주의, 군림과 권세, 유학의 가르침, 훈민정음 반포 반대 집현전 학자들과의 설전, 유학과 한글 훈민정음 배포의 진정성

by 신림83 2021.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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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화, 분노한 순간, 정찬손에게 일침, 이유, 사람의 천품, 선민주의, 군림과 권세, 유학의 가르침, 훈민정음 반포 반대 집현전 학자들과의 설전, 유학과 한글 훈민정음 배포의 진정성

 세종대왕은 온화한 왕이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런 왕께서 분노했던 순간이 있었다고 하여 챙겨 와 보았습니다.

세종대왕

세종대왕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세종(世宗)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1418년 8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31년 6개월 21일 / 11,525일)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 서문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강인하고 과감했다. 무거우며 굳세였고 점잖고 후덕했다. 크고 너그러웠으며 어질고 사랑하였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하였다. (英明剛果, 沈毅重厚, 寬裕仁慈, 恭儉孝友, 出於天性)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

세종대왕의 분노

원래 잘 화도 안 내는 세종대왕은 다음 아래 정창손의 발언에 임기 중 최고 수준으로 크게 화가 나 다음과 같이 혼을 낸다.

 

정창손 : 지금껏 백성들이 문자를 모르고 교육을 받지 못해서 비루한 짓거리들을 해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천품은 교육으로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종 : 감히 어디서 과인의 백성을 능멸하느냐! 백성의 천품이 교화될 수 없다면 네놈이 정치는 왜 해? 단지 백성 위에 군림하면서 권세를 누리기 위해선가!

 

-세종대왕의 일화 중

 

기득권, 지배계급의 마음가짐

 백성은 천품, 교육이 불가한 존재다.

우리같이 위대한 존재가 가르쳐야 한다.

 

세종대왕이 말하시 길

 배울 수 없는 존재를 두고 넌 정치를 왜 하느냐? 

 

백성의 위한 마음이라는 썰과

유학의 기본 사상을 지킨다는 썰이 공존하는 이야기

유학의 가르침에서 사람은 배움을 위해 변할 수 있으며,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 기본, 이를 무시하는 발언이라 화를 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학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본디 선한데, 악행은 외부환경과 요인 이걸 배우면 극복 가능하다.

 천하고, 무식한 사람도 배우면 된다는 것인데, 이를 무시한 발언이 힘들었던 거 같습니다.

둘 다 사람을 본다는 건 같은 포인트겠죠.

 

요즘 지배계급, 정치권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백성은, 일반 서민은 못 배우고, 답이 없는 존재로 본다. 유명한 개돼지썰 다 알지 않은가. 그나마 시원했던 세종대왕님의 발언

 

한글이 완성될 당시, 훈민정음 반포에 대한 집현전 학자들과의 설전

 

한글은 학문에 방해되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다라는 집현전 학자들의 의견
합의가 쉽지 않다.

한글을 사용하면 한문 공부가 소홀해져,

유학이란 학문이 위험해진다.

 

여기까진 뭐 그럴싸 한 의견

 

글을 모르는 일반백성은 늘 문제였다.

그런데, 여기서 

 

위에 등장한 정찬 손이 한마디를 지른다.

 

정찬손 이놈..

한글 안된다. 그거 배운다고 바뀌겠나에 분노하는 세종대왕

 

반론, 의견은 좋다. 말 바꾸기 안되

반론과 의견은 수용하나,

말 바꾸기 장난은 용납하지 않는다.

 

이후 반대 집현접 학자들을 항명죄로 다스리고, 

정찬손은 파직

 

*이후 복권되어 세조 때 영의정 가지 하게 됨

저때 뻘소리를 했지만, 일은 잘했다는 관리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애초에 정찬손이 저렇게까지 세종에게 극딜을 먹은 이유가 단순히 애들이 글 가르친다고 뭐가 바뀌겠음의 뉘앙스가 아니고


세종이 몸소 삼강행실도가 한문이라 접근성이 어려우니 한글로 번역하면 읽기 쉽고 행실도 바르게 될 것이다 라는 논지로 삼강행실도 번역을 추진했는데 애초에 정창손이 이에 대고 삼강행실도 번역하고 읽게 해 봤자 사람의 선악은 자질에 따른 것이니 진짜 무의미한 짓이라 어그로를 끌었기에 그렇게 분노를 산거임
현대에 비유하면 의무교육의 필요성을 부정한 것쯤으로 보면 편하다.

 

 

그리고 훈민정음 반포

유학과, 세종대왕의 한글 배포의 진정성

유학과 중화 사대는 정치적 관점에서 어느 정도 접근할 필요가 있음.
이걸 유학과 중화에 대한 맹신을 당대 사람들이 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정치적인 문제

조선은 이성계의 쿠데타로 고려왕가가 신하인 이성계가문으로 교체된 점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함.
너도 신하인데 왕 몰아내고 니가 왕했잖아. 나는 왜 못해? 하고 다른 신하가 반란을 일으키면 아닥해야 하는 나라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명분작업의 일환이 유학과 사대임.
명나라가 내가 왕 맞대. 명나라가 그렇다잖아. 라는 논리와.
군주와 신하간의 도리가 다르대잖냐. 너네는 이제 내 신하니까 그럼 안돼. 하는 유학의 논리는
이 명분을 세우기 위해 좋은 논리였음.

여기에 대한 반격이 그럼 명나라가 그게 아니라는데? 명나라에서는 그렇게 안하는데?
유학에서는 그게 아니라는데? 유학에서는 그렇게 안하는데? 라는 논리임.

조선이 유학과 사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게 이 때문임.
이성계 핏줄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근본 명분에 얽힌 문제이기 때문.

신하들이 유학과 중국을 근거로 들어 공격을 하면 왕이 그걸 부정하기가 어려움.
유학과 중국이 틀렸다. 라고 반박하면 자기가 왕인 것부터가 틀린 일이 될 수 있기 때문.
한마디로 왕 아닥시키기 가장 좋은 권위가 바로 유학이고 명나라임.

그런 관점에서 볼때에 신하들은 한문을 배척하기 위한 움직임이냐? 라는 점으로 중국이라는 명분을 흔든거고
유학이 어쩌고 하는 논리로 유학이라는 명분 또한 흔든 거임.

결국 저 반대는 왕권을 조금이라도 흔들어보기 위한 논리.

그러나 당시는 킬방원의 결정적 어시스트로 절대왕권이나 다름없는 세종의 시대이니 왕권을 흔드는건 어림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한글을 공문서등에 도입을 하는 식으로 바로 바꾸지 못했다는 자체가
세종에게도 유학과 명나라를 앞세운 공격은 상당한 부담이 되는 공격이라는걸 알 수 있음.

뭐 그런 정치적 부담을 떠안으면서 까지 기어이 밀어부쳤으니
세종의 한글로 이루고자 한 목적의 진정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거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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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을 분노케 했던 몇 안되는 사건...jpg

기껏 다 만드니까집현전 학자들이 단체로 몰려와서훈민정음 반포하시면 안됩니다아아아아 중국에 반하는 행동입니다아아해서 세종대왕 혼자서 저 학자들 전부랑 설전 벌이는데마지막에 정창

www.fmkorea.com

 

한글 정말 소중합니다.

 

이때 세종이 훈민정음 반포를 포기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한문을 쓰고 있겠죠...ㅠㅠ

 

참 다행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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