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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합천 해인사 팔만 대장경판, 일본이 수백년동안 눈독들였던 우리의 문화재

by 신림83 2020.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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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팔만 대장경판, 일본이 수백 년 동안 눈독 들였던 우리의 문화재

 웹서핑을 하다가 팔만 대장경 관련한 글을 보고 재미있어서 가져와 봅니다.

 

정확한 명칭은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해인사 대장경판

 기록유산이며, 서각류, 목판각류이며

수량은 81,352매라고 합니다. 팔만대장경이라고 어릴 때 많이 배웠죠! 실제로도 팔 만장이 넘어갑니다.

 

대한민국 국보 32호입니다.

그와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제되어 있습니다.

 

제작된 시기는 1236~1251년 동안 제작되었다고, 추측됩니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경내의 2동 장경 판교에 보관되고 있으며, 8만 장이 넘어갑니다. 해인사 대장경판, 혹은 재조대장경, 팔만대장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장경이란?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이다. 이 대장경판을 통하여 만들어진 대장경 판본 책들이 따로 존재한다.

참고로 북한 묘향산의 보현사에 팔만대장경 인쇄본(여기만 인쇄본이 있는 건 아니다 다른 곳에도 있음)이 있으며, 여기에도 장격판각, 목판 일부가 있다고한다.

언제 만들었는가?

 고려 고종 23~38년 에 걸쳐 진행되었다. 판수가 8만여 벌이라 팔만대장경이라고 만이 불리는데, 인간의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이 실려있다고 한다. 

왜 만들었는가?

 거란, 몽고 등의 외적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기 바라는 염원을 들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게 온전한 이유는 아니고, 고려 최씨 무신 정권을 회유하기 위한 중간 결과라는 썰이 있다. 

 

없어질뻔 했던 순간들

 일본이 꾸준히 이 팔만대장경에 눈똑을 들이고 있었는데, 조선 초기에는 승유억불 정책이라, 일본 입장에서는 오 지금 잘 보이면 주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세종 시기에 달라고 요청한 역사가 있다. 실제로도 세종은 넘겨줄 생각까지 하였는데, 의외로 신하들의 반대로 주지 않았다고 한다.

 

- 임금이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이웃나라에서 청구한다 하여, 처음에는 이를 주려고 하매 대신들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이 계속 청구하는 것을 지금 만약에 일일이 좇다가 뒤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이는 먼 앞날을 염려하는 것이 되지 못하옵니다.''

 

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임금이 일본의 청구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12월 25일 기사.

 

 이 대장경판이 지금은 정말 귀하고, 국보이고 하지만, 그 당시의 위치는 그렇게 까진 아니었고, 일본에 주지 말자는 건 이걸 쉽게 줘버리면, 이후 다른 요청이 올 수도 있지 않냐는 정무적인 판단이 컸다고 한다. 

 

 이 시기에 대장경판을 한양으로 옮길까란 논의도 있었다.

 

-임금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일본국에서 매양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청하니,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밖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라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開慶寺)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겠지만, 단지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에 논의하라."


하니, 모두 말하기를,


"수송하는 폐단이 있사오니, 그 감사로 하여금 검찰하여, 그 수령으로 하여금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세종 19년(1437) 4월 28일 기사

 

수량도 많고, 비용도 문제고 해서 그대로 두었는데, 그 이후 서울이 각종 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문화제가 소실된 걸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인 것 같다.

일본이 이 팔만대장경 목판을 참 좋아한다.

이후에도

 가짜 나라를 내세워 조선과 우애를 위해 달라고 한 역사도 있다.

 

공식적인 요청으로 80회가량 된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도 정말로 부처님이 보호하신 건지 무사히 넘어갔고,

일제강점기, 해인사 승려들이 죽을 각오로 막았다고 한다. 칼을 들고 목판에 가서 "대장경을 가져간다면 내 피로 더럽히고 내 원한을 묻혀 보관하는 일본 어디라도 저주를 내리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이 당시 김영환 대령에게 빨치산 소통을 위해 해인사 폭격을 명령했지만, 거부, 군사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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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13세기 몽골의 침략 때 불교 국가였던 고려가 부처의 힘으로 조국을 지키겠다는 염원으로 만든 걸작

우리에게는 팔만대장경으로도 잘 알려짐

 

일본

왜국은 이 대장경이 탐났음

조선 초 대장경 복사본을 조선이 준 적이 있는데 이걸 보고 눈 이 띠 용해 벌임

 

 

일본

"대장경 구다사이!!!!!

조선은 불교 싫어하무니다!!!!!

우리 구 다사이!!!!!"하고 찡찡거림

 

 

조선 세종

“육시럴! 올 때마다 지랄인데 그냥 줘버리자!!"

라고 생각한 게 세종이었음.

세종은 진짜 대장경판 주려고 함

어차피 조선은 공자였기 때문에 불교 유산은 노 쓸모였음

*승유 억불(불교는 억제 중)

*세종은 말년에 불교로 귀의

 

 

안대여, 신하 일동

"안됩니다 즈언하!!!!!!!"

하면서 의외로 당시 관료들이 두 팔 들고 반대함

 

 

안대여, 신하 일동

"달라는 거 계속 줘서 왜놈들 오냐오냐 키우면 큰일 납니다!!!!

! 조련은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라는 게 이유였음 문화재의 가치를 지키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외교 관계를 생각해서 반대함ᄋᄋ

 

*조선 초기 대장경은 의미가 큰 유물이 아니었기도 하다.

 

 

조선 세종

“Oᄏ... 그럼 다시 복사본 선물해줌"

 

 

일본

"따흐흑"


그 후에도 왜구 아닌 척하면서 와서 대장경판 달라고 함ᄏᄏᄏ

암튼 대장경판.... 장경판.... 앓던 왜국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다시 장경판 쌔비러 옴

 

 

사무라이?

“여어 - 대장경판을 가지러 왔달까ᄏ"

 

해인사 일동

"웅웅 알게 써요! 그럼 우린 같이 불타 죽을게!!!! 재나 가져가 라!!!!!"

 

하며 해인사 스님들은 절에 불을 질러서 장경판과 함께 생을 끝내더라도 일본에는 안 보내려 함

스님은 “내 피를 장경판에 뿌려서 장경판이 일본 어디에 가 든 그곳에 저주를 내리겠다"며 칼 들고 자해를 함

그렇게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장경판은 무사히 해인사에 서 지내고 있음

해인사 일동

신기한 건 합천 해인사에 큰 불이 7번이나 났었는데도 대장경 판에는 불이 안 번짐

그 옛날 고려인들의 염원대로 부처가 지키는 보물임

 

출처

 

일본이 수백년동안 눈독들였던 우리나라 문화재

 

www.ygos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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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해인사 역시 건축물로서 위대한 건축물이다. 한국이 습도가 높은 편인 국가 인대도 해인사 내부는 늘 바람이 불고 습하지 않은 환경, 목판인쇄물은 습한 환경이면 답이 없는데, 이게 이렇게 오래 보관될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설계 아닌가...

 

약간 국뽕이 믹스되어 있는 거 같은데 감안하여 봐주십시오

 

ㅎㅎ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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