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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정치

김재규 41주기, 박정희 살해 이유와 그 후,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도 미얀마와 같을까? 시민군 조직 내전양상으로 흐르는 미얀마 사태

by 신림83 2021.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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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41주기, 박정희 살해 이유와 그 후,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도 미얀마와 같을까? 시민군 조직 내전양상으로 흐르는 미얀마 사태

김재규 과거 군인이자 정치인 사망이후 41주기입니다.

 

김재규란 인물과, 그가 외 대통령을 살해했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와

 

김재규가 없었으면 우리도 지금 미얀마 사태를 겪었을 것이라는 말이 많아,

요즘 미얀마의 상태도 조금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재규

그가 잘했다, 못했다를 떠나서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金載圭

Kim Jae-gyu

김재규 출생

 

1926년 3월 6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이문리 (現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80-6)

사망 1980년 5월 24일 (향년 54세, 호적 기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본관 김녕 김씨 호 덕산(德山)

 

재임기간

제11대 건설부 장관 1974년 9월 18일 ~ 1976년 12월 5일

제8대 중앙정보부장 1976년 12월 6일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의 배경

박정희 정권이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을 때,

1979년 초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유가의 폭등과 전 세계 경제의 침체,

 

고도성장 중이던 한국에 타격이 심했다.

 

그 시절의 김영삼, 요즘 애들은 누군지도 모를듯..

기업 도산, 파업이 많았는데,

 

정치적 반대세력 신민당 김영삼이 박정희를 비난을 했다.

 

박정희에게 큰 걸림돌이었던 인물

 

김영삼의 위원직 제명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 부산을 탄압

 

부산 대학가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고

 

정부는 부산지역에 비상계엄 선포까지 한다.

 

계엄령이 내려진 부산, 경남지역

하지만 시위는 마산지역까지 확대되고,

 

땡크...

1979.11.30, - 류택형 변호사의 김재규 육성 녹취록

(10.26은) 우발적으로 실행한 일이 아니다.

김재규의 권총

*평소 사용하는 권총이 아니라는 점과 학인 사살 시 불발 등에서 치밀한 계획은 아니었다는 평가가 많다.

-혹은 해임과 제거, 징 별의 면하기 위함이라는 썰 또한 있는 것이 사실

 

 

1974년 9월 14일 건설부장관 취임식 때, 대통령하고 나하고 둘이 없어지자... 생각했다가 포기... 

 

1975년 1월 27일에도 마음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었다.

 

박 대통령이 도저히 돌아서지 않겠다는 판단은 1978년 12월.. 순리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구나..

 

금년 4월에도 한 번 실행하려다가 경비가 너무 강화돼서 연기...

 

(부마항쟁 관련 내용을 민란으로 보고하자... - 박정희가 직접 사살 명령을 장담했고, 그 모습에 절망하여) 실행한 것.

 

대의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희생시켰지만, 나는 대통령 무덤 위에 올라설 만큼.. 타락하지 않았다. (대통령 자리를 빼앗으려 계획 실행한 일이 아니다)

 

10·26 민주혁명으로 자유민주정권이 안전하게 출범하면, 박 대통령 묘소에 묘막을 짓고, 시묘하면서 여생을 바치겠다.

 

지미카터 행정부와 마찰이 많았던 박정희

지미 카터 행정부와 마찰이 많았던 박정희 대통령

핵개발, 인권 등을 주 재료

그래서 미국이 시킨 거 아니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음 

 


군사법정 최후 진술

전쟁에서 이긴 장군이 적의 포로가 된 기분.. 그래도 민주주의는 온다.

 

차지철부터 제거했던 김재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박정희 대통령을 잃은 것은 마음 아프지만, 국민들의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한 것이었기에 10.26 혁명은 필연적이었고 순수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많은 국민이 희생되더라도 유신체제를 그만 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유신의 지주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지만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그 원천을 두드려 부순 것..

 

또한 저는 대통령과의 의리를 배반하고 기 그 무덤 위에 올라 설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되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는 군인이자 혁명가.. 군인이 정권을 잡으면 반드시 독재가 됩니다.

 

모든 것이 중앙 정보부장을 지낸 저의 책임.. "제가 총책임자이니 극형에 처해 주시고, 부하들은 제 지시를 따른 것뿐이니 극형만은 면해 주십시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바치고 지켜온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혁명을 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혁명은 성공했습니다.

 

소의에 속하는 건 한꺼번에 다 끊어 비다 대의를 위해서 내 목숨 하나 버려버린다

 

"오늘이 마지막 말을 남길 최후의 날 아닌가? 또 한차례의 재판인 제4심은 하늘이 심판하는 것이다. '하늘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없다, '하늘의 심판에서 나는 이미 이겼다”

-사형 집행 직전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변호인들에게 감사합니다. 대장부 가이 세상에 나서 국민들의 자유를 회복시켰다는 자부심을 갖고 갑니다.”

 


박정희 암살 성공 이후, 이야기

18년의 철권 통지의 마감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유병현

암살 이후 한미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유병현은 글라이스틴에게 보고

 

글라이스틴

워싱턴 브레진스키와 국무부에 전파

 

박정희 사망 확인

 

헌법에 따라 최규하 가 국무총리 권력을 승계해야 한다.

 

 

이후 북한 관련 동향에 있어서는

북한은 정말 아무런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사건 개입 오해를 받기 않기 위함이란 말이 많음

 

최규하 대통령

1979.12.6

최규하는 유신헌법 절차로 대통령이 되고,

 

하지만 거의 허수아비라고 불린다.

 

진정한 지배자는

 

군부를 장악하는 자

 

여기에서 그가 등장한다.

 

아...

1979.12.12

 

새로운 대한민국 역사의 시작

 


요즘 미얀마 사태를 보며,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계속 가져왔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얀마 사태가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 나왔을 것이란 말이 많다.

 

텀으로 요즘 미얀마 이야기를 조금 하면

 

미얀마 시민국 결성, 경찰서 불태우고 군경 사실

시민들이 군대를 결성해 내전 양상으로 들어가고 있다...

시민군

스스로 지키자.

 

사제 총, 폭탄, 시민군의 경찰서를 불태우고, 군경을 사살하며 무장 저항을 한다.

 

24일 이라와디와 미얀마 나우에 따르면 미얀마 동부 카야 주에서 전날 카렌족 시민군과 정부군 간에 무력 충돌이 벌어져 정부군 40명 이상이 사망했다.

 

전날 오전 정부군이 카렌족 민가에 무차별 포격을 가해 민간인 2명이 다치고 주택이 파손됐다.

 

이에 카렌족 시민군이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 다정오께 모 (Moe Bye) 경찰서를 점령했다.

 

경찰서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정부군 최소 15명이 숨지고, 경찰서도 불에 탔다. 시민군 은 현장에서 붙잡은 군경 4명의 사진도 공개했다.

 

카렌족 시민군 측은 “정부군이 민간인한테 저지르는 잔혹한 행동을 보고 무기를 들어 다"며 "청년들은 시위하다 붙잡히고 살해될 바에 총기를 들고 순교를 택하겠다고 나섰 다"고 말했다.

 

카야 주 데모 소(Demoso)의 고속도로에서도 같은 날 교전이 벌어져 정부군 24명 정도가 사망했다.

 

시민군과 주민들은 정부군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가로막으면서 장시간 교전이 이어졌다.

 

카렌족 시민군이 경찰서 점거 과정에 붙잡은 군경 4명

뉴스의 일부...

 

내전상태..

 

미얀마에 빨리 평화가 오길 바란다.

 

김재규 사망 이후 41주년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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